빗소리와 더불어 새벽까지 책장을 넘기며 모처럼 밤을 즐겼다
청소년기부터 비를 유난히 좋아한 기억을 더듬으며
학창시절 장마철이면 학교도 며칠 때려 치고 시골집으로 낙향하여
그물망 모기장 쳐 놓고 그 속에서 시름시름 인생 앓이를 하던 기억
주말에 비오면 교복 윗도리 벗어 책가방 싸고 그 비 다 맞고 고개 떨어뜨린 채
터벅터벅 걷던 일
어른이 되어 처음 여행 경비 마련하느라고 절간에서 노가다 하루 2000원 받아
돌아오던 길에 비포장 신작로에 장대비 쏟아지는 날
그 비를 다 맞고 한 시간 넘는 길을 걸어오며 미친 듯이 이리저리 뒤틀며 발광하던 일
사랑의 눈동자를 마주 하던이와 팔당에 갔다가 비를 흠뻑 맞고
마지막 텅 빈 버스에 몸을 싣고 서울로 돌아오던 기억
수덕사 어느 한 민박집 처마 밑에서 하루 종일 내리는 비를 바라보던 일
빗방울 한 소리 소리마다에 새겨져 있는 예쁘고 아름다운
그러나 가끔은 쓸쓸하고 우울하기도 한
여러 형상들이 주마등 스치듯 생각의 저편으로부터 다가오기도 하지만
이 또한 생각해보면 내 일면의 풍요로움이 아닌가 한다
돌아다보면 이만큼 와 있는 세월 속에 진한 아쉬움과 미련이 남지만
나이 들수록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며 깔끔한 모습의 멋을 만들어 가야 하지 않나 싶다
비는 나를 즐겁게 하기 보다는 나를 아주 저 깊은 나락으로 끌어내려
천 길 낭떠러지기로 추락 시키지만 천길 정도 깊은 낭떠러지기에 추락이면
가끔은 즐거움이려니..... ...2002...